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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의 한라시론] 흰머리와 주름, 지혜와 경험의 흔적
김재희 hl@ihalla.com 기자
입력 : 2026. 04.23. 02:00:00
[한라일보]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한 달 전쯤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우연히 들은 가수 노사연의 '바램' 가사가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드는 것을 늙음이 아닌 익어감으로 표현한 대목은 노년의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노화불안(aging anxiety)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며, 어떻게든 젊음을 붙잡아 두려는 마음을 뜻한다. 역노화(reversing aging), 안티에이징(anti-aging), 동안 선호 열풍 역시 노화불안이 사회 전반에 얼마나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이듦을 젊음이 사라지는 일로 여기며 마주하기를 꺼린다. 노인을 향한 부정적 언어를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현실만 보더라도 나이듦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노화나 나이듦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질병의 위험은 커지며, 은퇴 이후에 소득이 줄어드는 변화들이 찾아온다. 사회관계가 예전보다 좁아지고, 고독과 외로움이 일상 깊숙이 스며드는 순간도 찾아온다. 이런 변화들은 나이듦을 상실과 쇠퇴의 시간처럼 느끼게 만들고, 그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키운다. 그럼에도 나이듦을 결핍과 두려움의 시선만으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

나이듦은 삶의 경험과 깊이가 쌓여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쁨과 행복, 감사와 감동을 통해 삶의 풍요로움을 경험한다. 그리고 슬픔과 아픔, 실패와 좌절을 견디며 다시 일어서기도 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은 세월이 흐를수록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진다. 이처럼 한 사람의 나이듦 속에는 한 시대를 살아낸 삶의 기록이 담겨 있다. 가족을 돌보고, 일터를 지키고, 지역공동체를 떠받쳐온 눈부신 시간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오랜 시간 삶을 견뎌오며 쌓아온 지혜와 경험은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래서 노년은 쇠퇴하고 저물어가는 시기가 아니라, 삶의 깊이로 존중받아야 할 시간이다. 와인이 시간이 지날수록 향이 깊어지고 가치를 더 인정받듯, 이제 우리 사회도 개개인의 삶이 쌓아온 시간과 경험을 더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초고령사회를 맞이한 지금, 노인들이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지역사회의 제도와 정책도 함께 변화해야 할 것이다.

작년까지는 검은 머릿속에 간간이 보이던 흰머리가 올해 들어 부쩍 더 눈에 띈다. 예전에는 흰머리를 뽑으며 속상해했는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려고 한다. 흰머리 한 올 한 올은 내가 열심히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자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어온 시간의 증표라고 생각하려 한다. 나이듦은 잃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삶이 깊어지고 사람의 향기가 짙어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아름답게 익어가기를 바란다. <김재희 제주연구원 고령사회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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