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배의 하루를 시작하며] 나는 얼마나 잘못했는가

[신순배의 하루를 시작하며] 나는 얼마나 잘못했는가
  • 입력 : 2026. 04.22(수) 03:00  수정 : 2026. 04. 22(수) 09:19
  • 신순배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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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생각이 틀어진 것은 순전히 아내 때문이다. 애초는 날리는 벚꽃잎에 깎여가는 봄을 글로나마 잡아두고자 했었다. 재주가 젬병이니 생각대로 될 리는 없고 거실만 뱅뱅 돌았다. 탁자 위에 아내가 먹다 남긴 고구마 몇 덩이. 한입 베어 물다 묻어온 옛 기억도 함께 꿀꺽 넘기게 된 것인데.

차로 고향 법환마을에 들어서 벚꽃엔딩 두 구절쯤 들을 때면 왼쪽으로 1리에 이르는 몽돌 해안이 나온다. 입에 익기로는 '남매'인데, 남해(南海)였을까 생각해보지만 어쨌든 내게는 남매. 지금은 너른 정원을 거느린 커피점이 들어서 구실을 할 뿐 일대는 잡풀만 들어차 꼴이 험악하다. 그나마 갯가 쪽은 그대로여서 옛 생각을 짚어볼 수는 있다. 초입인 억새밭을 지나면 해안이 활처럼 굽었고 그 위로는 내 할머니 이마 겹주름 같은 고구마밭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해안 끝 동쪽에는 자연동굴을 품은 큼지막한 암반지대가 있고 그 위로는 '망팟'이라 부르는 넓은 구릉이 솟아있다. 정상에 오르면 성근 잡목을 피한 서너 뙈기의 밭에 드문드문 고구마 저장 구덩이가 있었다.

동갑인 근영과 동생 근수와는 이종사촌지간이다. 학교가 파하고 이모 집을 거쳐 남매에 다다르면 하루 나절은 온전히 우리의 시간. 봄이 먼 겨울엔 보말 떼고 소라를 잡거나, 망팟 동굴 안에서 띠기 만들어 먹기, 나뭇잎 말아 입 담배 피우는 어른 흉내 놀이가 다였다.

"감저(甘薯·고구마)나 파먹게" 오후 만조인 보름사리. 갯가마저 바닷물에 흔적없이 잠겨버리면 하릴없이 망팟에 올랐다. 주저리 틈으로 팔을 넣어 고구마를 꺼내는데 밭 주인어른의 천둥 같은 고함소리. 밭담은 개구리 뛰듯, 잡목은 비 사이로 막가듯, 평지는 땅이 발에 닿는지도 몰랐다. 장재근 정도는 빨랐지 싶다. "흩어져!" 마을 안 사거리에 닿자 각자 세 길로 갈라져 뛰었다. 그때야 뒤통수에 매달렸던 거친 숨과 욕지거리가 툭 하니 떨어졌다. 이른바 결정 장애를 유도하는 줄행랑 기법.

지금에야 여문 머리로 톺아보는데, 잡자고 했으면 조용히 다가와 목덜미를 낚아채면 되었고, 뛴들 우사인 볼트가 장재근을 못 잡을 리도 없던 거였다. 뿐인가. 해마다 가을에서 이듬해 봄까지 서리의 수준을 넘게 훔쳐먹었지만, 뒤통수로도 이름을 아는 작은 마을에서 집에 찾아와 따지지도 않았다. 세월을 가늠하면 어른은 이미 돌아가셨을 터. 죄스러움은 더 커지고 고맙기도 하고.

고구마 한입으로 어린 시절을 되새겨 본 것이었으나, 생각은 그치지 않고 덩이 캐듯 올라오며 어린 시절 악행에 송연해지는데, 갯가에서 잡은 게의 다리를 모두 분질러 놓아주었으며, 못 먹는 망둑어를 재미로 낚아 말려 죽였다. 억새밭에서는 지척에서 우는 어미 꿩을 아랑곳 않고 알을 싹쓸이했고 개천에서는 잡은 개구리 뒷다리를 잘라 구워 먹기까지 했으니, 그만하길 애써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나는 얼마나 잘못했는가. 잡아두려던 봄날은 죄스러움만 가득해지고. <신순배 수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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